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in Albuquerque
 
광야의 소리 1998.12-C  
 

우리의 울타리가되시는 하나님




최영심 권사

이곳 알버커키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본래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전혀 성경 말씀과 교회라는 곳을 알지 못했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계통의 여학교로서 성경시간과 채플 모임이 늘었고 성경 말씀을 들을 기회도 많아졌지만 다만 성경은 학교수업에만 의존할 뿐 교회에는 출석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감리교 계통의 여자 대학을 입학해서 일주일에 세 번 채플시간과 졸업하기 위한 성경시간 학점만 이수할 뿐 그 외에 교회와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저를 사랑하셨던지, 남편을 통해서, 또한 오랜 예비기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들어서게끔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교회 생활과 성경 말씀대로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때, 저는 왠지 이상하게 보이고 주일마다 교회에 참석하는 것도 때론 귀찮고 특히 속회 모임 때는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고, 주일의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듣고, 교회 문밖에 나오면 다 머리에서 사라지고, 그때는 아이가 어려서 교회에 가면 아기 돌보랴 제대로 예배도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 그저 시간 끝나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출석하는 생활을 약 6년 동안 하다가 저희가 대림동(영등포에서 안양가는 방면)으로 그 당시 그곳에 새집을 많이 짓고 안양과 영등포로 통하는 큰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그때에, 처음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사를 한후, 당분간은 교회를 출석치 않고 있던 차에, 하루는 감리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한집 한집 심방을 하시던 중에 저희 집에도 오셨는데(지금 LA계신 이병설 목사님) 그날이 마침 저희 시어머님 추도식인데, 제가 목사님을 처음 뵙는데 그렇게 반갑고, 오늘 저녁 저희 집에 오셔서 추도 예배에 참석해 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오게끔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 식구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서 (지금 대림감리교회 임준택 목사님) 성경 말씀을 배우고, 교회 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교인들과도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세월이 지난 후에 저희 남편은 새로운 직장(現 울산 현대중공업)인 현대 조선 근무 관계로 울산으로 내려가시고 그때부터 저희 식구는 떨어져서 생활하는 時代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저와 아이는 그런대로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직장에서 바쁜 관계로 주야로 많은 일을 하며 전혀 주일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신앙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은 있어서 기도는 가끔 하였고 그가 학교 때는 정말 불타는 신앙과 믿음으로, 한때는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려고 고심할 때도 있었던 믿음은 있었지만, 그때의 직장 생활이 신앙을 지키기에는 너무도 환경이 열악해서 지키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고는 살았던 것입니다.

울산으로 내려간지 얼마 안된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서 혼수상태라는 연락을 받은 저는 먼저 목사님께 아뢰고 (그 당시 서울은 밤 12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있었음)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하나님 한번만 용서하시고 살려주세요."하는 기도만 되풀이하면서 울산 병원으로 가보니, 밤에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정신이 회복되어서 안정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서울의 목사님과 온 교우들이 성전에 나와 간절히 기도하며, 목사님께선 기도하실 때 "강권사님에겐 재산이라곤 그의 머리에 들어 있는 지식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머리를 예전과 같이 같게 해 주셔야, 아직도 세상에서 그가 할 일이 남아있으니 하나님 함께 해 주십사"하는 기도를 밤새하시면서 울산에 내려와 보시고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많은 회사의 중요한 일 때문에 해외 출장(배를 해외에서 수주해야 되기 때문)이 잦아지고 서울의 집은 정거장 역할을 할뿐 주일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해외 출장을 많아 하다 보니까 먼저 일본 지사장 2년, 뉴욕 지사장 3년을 통해서 해외 생활도 몇 년 했던 것입니다. 귀국후 회사에선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저희에게도 한 채 주어서, 울산을 오고 가는데도 편리한 지점이 되고 생활하기도 편리한 곳이 되어서 회사측에 감사할 뿐입니다. 울산이 멀어서 본인이 직접 운전하며 오고가는 도중에 몇 번의 교통사고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볍게, 상처 없이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면서 저는 늘 새벽기도를 매일 아침 시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정과 떨어져 오랜 세월동안 생활을 하니까, 자연히 기도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아이가 미국 가서 공부도 더하고 미국 생활을 해봐야 되겠다고 모든 수속을 끝내고 LA로 떠났던 것입니다.

아들을 떠나 보내고 혼자 남은 저는 새벽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시기에 우리 식구는 늘 떨어져서 생활을 해야하나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미국간지 그 다음해에 남편은 정년으로 회사를 은퇴하고, 서울에 와서 조그마한 무역회사를 만들고 무역을 하다 보니까 앞으로의 시장은 중국인데 中國語를 알아야 중국과 교역을 할 수 있음을 느끼고 중국 상해의 후완대학에 중국어 연수를 위한 유학을 떠나고 회사는 저에게 맡기고, 저는 Fax를 통하여 남편과 연락하면서 그런대로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1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저는 늘 기도하기를 저희 식구가 같이 생활 할 수 있는 길을 역사해 달라고 많은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이 들면서 재물에 욕심을 갖고 돈을 사랑하면 무엇하며, 많지도 않은 식구가 떨어져서 생활하다 보니까 정신과 육체만 피로할뿐, 인간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니까, 우선은 식구가 한데 뭉치는 것이 우선 과제인 것을 생각하고 새벽기도 때마다 하나님을 졸라가면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기도하던 중에, 남편에게 간절히 미국으로 가야 되겠다는 장문의 편지를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그후 남편은 학기를 끝내고 귀국 후에 ,우리는 의논 끝에 우선 방문차 LA와 이곳 알버커키(이곳에는 사촌 동생이 살고 있었음)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어렵다고 하는 영주하는 조건도 변호사를 통해서 쉽게 할 수 있게 인도하시고, 조용하고 아늑한 도시 분위기와 쾌청한 날씨와, 인심 좋은 이곳 미국 사람들의 인정을 느끼면서, 또한 지금의 저희 장막도 별로 어려움 없이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뿐 입니다. 오랜만에 저희 식구들이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특히 주일을 같이 지키며 믿음의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식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들을 이곳까지 데려 오시려고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저희를 훈련시키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셨던 것을 압니다. 끝으로 그 동안 저의 삶을 통해 얻은 확신을 말씀드린 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결심했으면, 그때부터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라면서, 두서없는 저의 글을 끝맺으려 합니다.